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차량제작 시발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|| [youtube(NxyajFqcsCI)] || ||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[* 全永先. 1939년 대구 출생. [[계성고등학교(대구)|대구계성고등학교]]와 [[계명대학교]]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[[하동환자동차]]에 입사한 이래 [[신진자동차]], [[새한자동차]], [[동아자동차]], [[쌍용자동차]] 등에서 [[하동환뻐스|하동환 A60]], [[새한 BD#s-2.2|새한 BD098]], [[자일대우버스 BF#s-2.1|BF101]], [[동아 HA/HR버스|동아 HA20, HR252]] 등 주로 국산 버스 차종의 개발 및 디자인에 참여했고, 1992년 은퇴하여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자동차의 보존 및 복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.]의 인터뷰. || 버려진 미군 지프를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플랫폼, 파워트레인이 [[윌리스 MB]]와 같다. 그리고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 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생산했을 정도이고 제작 기간도 수개월이 걸릴 정도였다. 엔진의 경우 함경도 아바이라는 별명을 가진 [[김영삼(동명이인)#s-2.1|김영삼]][* [[김영삼|14대 前 대통령]]과는 다른 사람이다. 한국 자동차 공학 1대급 엔지니어인데 본인은 정규교육을 받은적이 없지만 교회에서 한글과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의 기계설계 책들로 독학을 하고 나중에 일본으로 직접 가서 기계설계와 엔진설계, 주조까지 배웠던 사람이다.]이 주도해서 제작했다. 미군 폐차 부품이 떨어져 가는 상황이 되자, 당시 [[국제차량제작]]의 최무성 사장에게 엔진 국산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국산 엔진 제작이 추진될 수 있었다. 미제 엔진을 [[리버스 엔지니어링]]을 한 끝에 1955년 국산 엔진 제작에 성공했다. 놀랍게도 전통적인 대장간 거푸집 [[주조]]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. [[열처리]] 문제 때문에 엔진이 파손되는 시행착오를 10번이나 반복한 끝에, 열처리 방법을 터득하여 11번째 시도에 성공했다. 4시간 연속으로 엔진을 고속으로 작동시켜보는 방식으로 성공을 확인했다. 1954년 국산 엔진 제작을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.[* [[https://youtu.be/73BmYOME-xc?si=ERkX5pcfNjfAv-Nr|KBS 스페셜 - 빅 아이디어 (2부) 산업의 심장 편]]] 자사의 자동차 부품들이 멋대로 활용되고 복제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 자동차 회사 관계자가 시발차 공장에 와서 엔진 만드는 광경을 보고 뜻밖의 의미로 경악했다고. 그래서 그는 '''"[[공밀레|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.]] [[특허|하지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둬야 할 겁니다.]]"''' 라면서 찬사와 경고를 해주고 갔다고 한다. 현대자동차의 [[현대 포니]] 엔진 국산화를 담당했던 <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>[* 1985년 저작인데 당연히 절판되었고 중고 시세가 15만원 정도한다. 이에 2022년에 <응답하라 포니원 -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>으로 재발간 되었다.]의 저자 강명한에 따르면, 서울대 기계공학과 2학년 재학중에 영등포 시장 근처의 삼성공업사[* 당연히 [[삼성 그룹]]과는 관계가 없다.]에서 실습을 했는데 당시에 시발자동차 엔진을 제작했었다고 한다. 청량리의 주물공장에서 엔진 블록을 만들고 삼성공업사에서는 블록을 [[드릴링]], 보링하여 완성했다고 한다. 실습 이후 자신이 시발자동차 제작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에 시발 택시를 탈때 마다 운전기사에게 국산 엔진 성능이 어떤지 넌지시 묻고는 했다는데 출시후 두어달 되면 힘이 다 빠진다고 불평을 듣기 일수였다고 한다. 보통 중고 미군 지프차 엔진을 구해서 바꿔 달았다고(...)[* <응답하라 포니원 -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> 24쪽] 상술했듯이 엔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며, [[6.25 전쟁]] 직후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기술에서도 복제에 성공한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. 1955년 8월 출시 당시 이 차량은 최초에는 인지도가 낮고, 유선형의 다른 자동차와는 달리 사각형의 투박한 디자인인지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[* 폐차된 지프를 재활용하여 조립했고 차체 일부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. 현역 당시 생산시기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서 완전히 똑같은 형태가 아니었다.], 6.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10월에 개최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이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. 당시 대통령이었던 [[이승만]]은 이 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, 오히려 상류층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. 심지어 시발차를 생산하기 위하여 주문자에게서 받은 돈만 1억 환이 넘었다고 하며(당시 판매가는 약 90만 환), 시발차를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팔려고 시발계까지 생겼다고 한다. 그 후 1962년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서 [[닛산자동차|닛산]]에서 개발한 자동차인 [[닛산 블루버드|블루버드]]와 동일한 부품을 수입해서 생산한 '새나라'가 등장하면서 시발차는 새나라에 비해 품질, 디자인, 성능 등에서 밀리다 보니 판매량 저하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. 시발차는 약 3,000대가 넘게 팔린 것으로 보인다. 제주도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시발택시가 현역으로 운용되었다. [[https://m.blog.naver.com/hudol-i_film-2018/222991201477 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